이 책의 출간을 반기며
오근재
초등학교 교실에는 태극기보다 약간 아래로 양편에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다. 칠판은 언제나 그 아래에 있는데, 공부가 국가 이데올로기나 도덕률 아래 있어야 한다는 위게 질서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 배열도 없을 것이다. 급훈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칸트(Kant)가 말한 바 있는 권리의 문제로, 그 학급 구성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그렇지만 반드시 실현해 나가야 할 이상적인 덕목이다.
그렇다. 이 시점에서 디자인 아포리즘은, 마치 디자인 교실의 급훈 처럼 새삼스러운 권리의 문제로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다. 디지털 미디어들이 체온 없는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영토의 흉내내기인 지도가 그 정밀함을 한없이 밀고 나가 오히려 원래의 땅을 덮어 버리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 등장하며, 원본 없이 차이와 반복으로 끝없이 비슷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이 시물라크르(simulacre) 시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고, 기계와 프로그램의 개발로 더 지혜로우며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간직한다.
기계의 능력을 믿고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이 기계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진실로 깨닫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이러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디자인 아포리즘」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충격이다. 이책에 실린 경구들은 어둠 속에 등장한 랜턴처럼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드러내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마치 디자이너들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 법정에 걸어들어 온 낯선 증인을 보듯 공포스럽게 그것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그 삶 속에 아포리즘들을 녹여 낸 이들이라면 이 마주침이 뚜렷한 인상을 남기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마치 골리앗(Goliath)처럼 다가온다면, 아득함과 깊은 두려움, 혹은 가슴 찌르는 통증을 몰고 온다면, 그는 디자이너로서 깊은 수면(睡眠)과 무지에 빠져 있었음을 이미 자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지금의 디자인계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늘 깨어 있기에 디자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이러한 아포리즘으로부터 큰 소용을 찾진 못하더라도 사유의 여백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언제나 사유는 사유하지 않는 바를 남기는 법이니 말이다.
한편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이들에게는 이 아포리즘이 시대의 자명종이 되어, 정신을 흔들어 깨우고 지성의 밝은 창가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시대의 다양한 요청들을 수용해야 할 중심에 서 있다. 들뢰즈(Deleuze)의 말처럼, 이 시대에는 예술가나 철학자나 다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개념을 만들어 낸다면, 그 실재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디자이너 아닌가?
부디 이 책이 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대낮에 들고 다녔던 등불처럼, 오늘날 한국 디자인계의 지헤를 찾기 위한 광원이 되길,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의 나침반이 되기를 빈다.
끝으로 이 책의 출간을 기획하고 추진해 왔던 우리의 영원한 친구, 서기흔 교수의 형안(炯眼)과 집념에 갈채를 보낸다.
무지와 어두움의 심연에 빠져 있을 때, 무엇이 빛인지 알려야 할 의무에 먼저 화답한 자가 바로 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육화(肉化)된 또 다른 형식의, 이 시대의 아포리즘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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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님
오근재
초등학교 교실에는 태극기보다 약간 아래로 양편에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다. 칠판은 언제나 그 아래에 있는데, 공부가 국가 이데올로기나 도덕률 아래 있어야 한다는 위게 질서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 배열도 없을 것이다. 급훈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칸트(Kant)가 말한 바 있는 권리의 문제로, 그 학급 구성원들에게 가장 부족한, 그렇지만 반드시 실현해 나가야 할 이상적인 덕목이다.
그렇다. 이 시점에서 디자인 아포리즘은, 마치 디자인 교실의 급훈 처럼 새삼스러운 권리의 문제로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다. 디지털 미디어들이 체온 없는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영토의 흉내내기인 지도가 그 정밀함을 한없이 밀고 나가 오히려 원래의 땅을 덮어 버리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 등장하며, 원본 없이 차이와 반복으로 끝없이 비슷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이 시물라크르(simulacre) 시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고, 기계와 프로그램의 개발로 더 지혜로우며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간직한다.
기계의 능력을 믿고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이 기계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진실로 깨닫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이러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디자인 아포리즘」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충격이다. 이책에 실린 경구들은 어둠 속에 등장한 랜턴처럼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드러내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마치 디자이너들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 법정에 걸어들어 온 낯선 증인을 보듯 공포스럽게 그것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그 삶 속에 아포리즘들을 녹여 낸 이들이라면 이 마주침이 뚜렷한 인상을 남기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마치 골리앗(Goliath)처럼 다가온다면, 아득함과 깊은 두려움, 혹은 가슴 찌르는 통증을 몰고 온다면, 그는 디자이너로서 깊은 수면(睡眠)과 무지에 빠져 있었음을 이미 자백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지금의 디자인계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늘 깨어 있기에 디자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은, 이러한 아포리즘으로부터 큰 소용을 찾진 못하더라도 사유의 여백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언제나 사유는 사유하지 않는 바를 남기는 법이니 말이다.
한편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이들에게는 이 아포리즘이 시대의 자명종이 되어, 정신을 흔들어 깨우고 지성의 밝은 창가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시대의 다양한 요청들을 수용해야 할 중심에 서 있다. 들뢰즈(Deleuze)의 말처럼, 이 시대에는 예술가나 철학자나 다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개념을 만들어 낸다면, 그 실재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디자이너 아닌가?
부디 이 책이 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대낮에 들고 다녔던 등불처럼, 오늘날 한국 디자인계의 지헤를 찾기 위한 광원이 되길, 끊임없이 자기 수정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의 나침반이 되기를 빈다.
끝으로 이 책의 출간을 기획하고 추진해 왔던 우리의 영원한 친구, 서기흔 교수의 형안(炯眼)과 집념에 갈채를 보낸다.
무지와 어두움의 심연에 빠져 있을 때, 무엇이 빛인지 알려야 할 의무에 먼저 화답한 자가 바로 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육화(肉化)된 또 다른 형식의, 이 시대의 아포리즘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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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님






덧글
그레이트 티쳐님이
낸 책.